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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kny's 구뜨인포

체 게바라 타임지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체 게바라 (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에르네스토 게바라
출생 :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사망 :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
학력 :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 의학과
국적 : 아르헨티나, 쿠바
정당 : 쿠바 공산당, 볼리비아 공산당
경력 : 쿠바 국립은행 총재, 쿠바 산업부 장관


흔히들 이야기하는 혁명, 그러한 혁명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인물 중 한명이 체게바라가 아닐까 싶다.
나 또한 혁명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체게바라가 생각났으니 말이다.
이러한 체게바라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쓸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점에서 이 포스팅은 시작되었다.

긍정적으로 본다, 부정적으로 본다 라는 개념이 아닌
혁명의 아이콘으로 대략적으로만 알고 써왔던 인물이기에 정확하게 알고 써야겠다 라는
내 욕심으로 인해 찾아본 정보들이다.

" 인류가 자신의 불행에서 도피하고 싶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모든 것을 불과 피로 파괴하는 것... 다른 길도 없고, 다른 희망도 없다. "


체 게바라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본명이 아닌 애칭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것이 본명으로 불러지고 있는데 체(Che')의 뜻은 이탈리아어 케 코사 체/ 무슨일이야? 를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 북동부와 파라과이에서 통용되는 과라니어에서 체는 나 또는 나로서는 이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쿠바 혁명의 주도자라는 이유로 쿠바출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르헨티나 사람이다.


산타 페 주 로사리오의 귀족가 혈통을 이어받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법 큰 병원 원장이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유년기 시절을 보냈던 체게바라이다.
부모가 둘 다 중립적 자유주의자라 어릴적부터 스페인내전 패배로 망명한 국민정부 인물들과 만나
진보적인 사고에 대한 지각을 넓혔다고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정에 헌신적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커졌다고 한다.

어린 시절 에밀리오 살가리의 소설들에 빠져 살았는데 이 소설들에서 반제국주의적 사고관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미숙아로 태어난 체게바라는 두살이었을 때 아버지의 팔에 안긴 채 차가운 여울을 건너다 천식에 걸려
흡입기를 평생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학창시절에는 럭비를 즐겨하는 스포츠맨이었고 시가를 즐겨 피웠다고 한다.
호흡기와 럭비는 정말 안어울리지만 그만큼의 의지가 보이는 대목이다.

장래희망이 의사여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를 졸업했으나 친구였던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모터사이클로
남미 대륙을 여행하면서 피폐한 남미의 현실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빈부격차로 인해 좌절하는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농장의 노예들과 광산의 노예가 많았다고 한다.

CIA 사주를 받은 군부가 좌파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가졌다고 한다.

현실에 좌절하여 의사 가운을 던지고 혁명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 때 친구였던 그라나도는 혁명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의사활동을 했다고 한다.
쿠바 혁명이 성공한 뒤 체게바라의 초청으로 쿠바로 와서 의과대학을 창립하고 생화학 교수로 일하며 쿠바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 후 과테말라 혁명에 참여를 하게 되었는데, 이 혁명은 실패고 끝이 나버렸고
쿠데타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자 맥시코로 탈출했다.
1955년 7월 10일 평생 동지가 된 변호사 출신 피델 카스트로(위 사진)를 만나서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집권하는 쿠바에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혁명군에 종사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을 겪은 군인 알베르트 바요 아래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쳐 강건한 병사로 단련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 훈련은 명령을 어기거나 불손한 행동을 보이면 바로 총으로 사살을 했다고 한다.
인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자유권 등이 없었던 시절로 보인다.

 

1956년 11월 25일 맥시코의 툭스판에서 요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한 82명의 사람들은 12월 2일 쿠바에 도착했다.
그들은 상륙 직후 바티스타 정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서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17명 혹은 12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는 체 게바라가 포함이 되어 있으며 17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12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탈출한 혁명군은 그곳을 기점으로 바티스타 정권의 폭정에 지쳐있었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기세가 성장하였다고 한다.

2년 뒤인 59년 1월 수도 하바나에 입성하여 독재자 바티스타를 쿠바에서 몰아내었다.
포코이론의 성공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혁명 직후 체게바라는 쿠바의 일반대사로 해외에 파견되어 이집트의 나세르, 인도의 네루,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 비동맹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만나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외교활동으로 우호를 다졌다.

UN 총회에서도 쿠바 대표로 참여를 했으며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났다고 한다.
이때부터 검은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체게바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고 한다.

이 후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농업국 쿠바를 공업국화 하려는 계획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출신인 체게바라의 한계가 있듯이 의료개혁은 옛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쿠바로 초청하여
임상학 연구소를 설립하게 하고 산티아고와 하바나 대학등 의대에 전폭적으로 지원을 했다.
미국과 단교된 상황에서 의학은 발달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던 동지인 카스트로는 친소련정책을 취하며 자국내 소련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허용하였다.
그로부터 얻는 것은 소련으로 부터 군사, 경제적 원조를 얻었으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체게바라는 소련의 진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게 되었고 카스트로와의 사이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1월 알제리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소련을 향해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자' 라는 비난을 했고
이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서기장이 /그가 공직에서 사퇴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적 원조를 중단하겠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카스트로의 지시로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게 된 체게바라는 혁명 정권 내에서 고립이 되었다.
그 해 5월 가족과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소수의 지지자들과 쿠바를 떠나게 된다.

그 후 그는 독립국이 탄생이 많이 되고 있던 아프라키였고 내전이 한창인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자리를 잡고자 노력을 했다.
스페인어와 카톨릭으로 공통점이 많은 남미와 달리 아프리카는 다른 세상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약탈밖에 관심이 없었고, 콩고 반란군은 술집, 매춘에만 매달리고 있었고
콩고 공산세력은 체게바라를 적대시 하였다.

콩고에서 실패를 하게 된 체게바라는 11월 20일 탄자니아로 도망을 쳤다.
그 후 주위에 있는 부하들은 모두 쿠바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는 1966년 11월 변장한채 볼리비아로 입국을 하게 되었다. 

 체게바라는 볼리비아 공산당과 연계해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소련에게서 낙인찍힌 그를 볼리비아 공산당은
식구로 취급하여 지휘권 문제가 발생하자 체게바라는 정글로 향하게 된다.

1966년 볼리비아의 공산당 지도자 마리오 몬헤는 자신이 볼리비아 투쟁을 지휘하겠다고 나섰다.
체게바라도 이에 대응하며 볼리비아 투쟁을 지휘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몬헤는 볼리비아인 게릴라에 남고싶으면 남되 당의 지원을 기대하지말라고 말했다.
볼리비아 농민들이나 주민들은 체게바라를 적대시하여 신고를 했었고
원주민조차도 이야기를 듣고자 하지 아니했다.
( 사실 볼리비아 공산당 지지세력은 광부나 도시노동자라고 한다. 이 사실을 카스트로조차도 침묵하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

그는 카스트로 다음으로 미국에게서 타겟이 되었고 CIA 가 나서서 네이비 씰에 의해
양성된 정예 레인저부대를 투입했다고 한다.

11개월동안 추격을 피해 도망을 쳤으나 1967년 10월 8일 추로 협곡 전투에서 본대와 떨어진 상태로
몇 안되는 부하들과 함께 정부군 특무대대의 매복에 걸려 자신도 총상읍 일고 생포가 된다.

생포당시 체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한다.

" 쏘지 마라 ! 나는 체 게바라다.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더 가치 있다."

체게바라는 근처에 있는 라 이게라 마을의 한학교에 감금이 되었고
다음날인 9일 CIA 지령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는 그를 살려두면 화가 될것이라 생각이되어
비밀리에 죽이기로 결단하였다고 한다.

집행자들이 머뭇거리자 체게바라는 당신이 날 죽이려고 온것을 알고 있다.
떨지말고 방아쇠를 당겨라. 당신은 단지 한 사람을 죽이는 것 뿐이다 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보았을 때 체게바라는 혁명으로는 성공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실패를 했다.
공산주의를 선호하지만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를 하는 것은 맞다고 본다.

하지만 빛과 어둠은 공존하듯이 체게바라도 비판적인 요소가 많다고 한다.
반 혁명주의자들을 처형하거나 자신과의 뜻이 다르다고 해서 베타적으로 본다는 것은 안좋은 것이다.
일반화 시켜서 쳐다보는 것만큼 세상에 오류를 만들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없다고 본다.

오늘은 체게바라의 히스토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