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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kny's 구뜨인포

419 혁명 제대로 알고 보자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고 다녔던 적이 있다.

정말 창피하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을정도로 자괴감이 심각하게 들었다.

 

왜 그런생각이 들었을까?

사람이 살다보면 누구나 다 실수할 수 있는 부분아닐까?

고작 잘못알고 있었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내가 자괴감을 느껴야 하나?

 

하지만, 정답은 하나였다. 바로 '애국심'

나라가 나에게 뭐를 해줬는데 이래~

라는 식으로 장난식으로 이야기를 해도 뼛속부터 한국인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모르고 있다는 내자신에게 화가 나는걸 보면

전형적인 한국사람의 모습을 나도모르게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하루 앞으로 다가온 419혁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419혁명은 1960년 이승만 정부때 일어났던 혁명이며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하기 사항은 나무위키와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가미된 글이다)

 

 

## 4.19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서울광장 인근

419혁명은 1960년 4월 한국에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여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대한민국 제 1공화국을 종식시킨

민주주의 시민혁명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시민혁명.

저때는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끝난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1960년대이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고 한다.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적어도 5년전부터 지속되어져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950년~1960년대 시대적 상황이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시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반독재 민주시위가 가능했다는 것이 의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 무너지는 이승만 동상

1950년대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층에 속해있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논조는

그 당시 정부인 이승만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를 시켜 주었다.

개인적으로 문화와 언론이 가진 힘은 그 어느누구도 무시를 못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계층에게 전파력이 뛰어나고 공신력이 뛰어난 신문은 더할나위없이 좋은 매개체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 당시 먹고 사는것만 생각해도 벅차있었을텐데 더 좋은 사회상, 사회구조상을 이야기를 하면서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민들은 단합을 했을것이라 생각을 한다.

 

이에 해당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초기 언론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정책을 진행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건 몇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1955년 '동아일보' 괴리 표기 오식사건
편집장의 실수로 대통령을 암시하는 단어 고위층 앞에 괴뢰라는 단어를 붙였다고 한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발행인 및 편집인 불구속 입건된 사건.

1955년 '대구 매일신문' 테러사건
백주대낮의 폭력은 테러가 아니다
경찰당국의 발언이다. 정치깡패들은 소재불명처리, 경찰에 신고한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1957년 류근일 필화사건

1957년 '동아일보' 고바우 영감 필화사건

1958년 함석헌 필화사건

1958년 2월 4일 국가보안법 파동
국가보안법 3차 개정과정에서 17조 5항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조항임을 발견
반발했던 야당의원들은 무술유단자로 인해 한데로 모아놓고 여당의원들은 통과시켰다고 한다.

1959년 '경향신문' 폐간사건
미국 대사인 월터 다울링이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또한 행정처분의 가처분신청이 수용이 되어 이승만 정권은 무기발행정지 처분으로 응수하였다.

 

시민들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 뉴스.

신문사에 대한 억압과 탄압이 들어가며 시민들의 의식을 잠재우려고자 했던 이승만 정권의 행동이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은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사건들이라 생각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던 그 시대를 살아갔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과연 어떠한 생각이었을까?

지금 내 30줄이 넘은 내 나이를 거쳐가면서 이리저리 생각을 해봐도 민주주의 운동을 위하여 발벗고 뛰는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라는 생각을 한번쯤은 하게 되었다.

 

 

// 사회적 상황 (419혁명 시대상)

이 당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의무교육제가 채택되었으며 빈민층일수록 학구열은 더 높았다고 한다.

교육을 통해 누구라도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 라는 기대감이 조성이 많이 되었기에 시민들의 교육열은 불탔다고 한다.

이러한 사항으로 인해 1945년에서 1960년까지 학생의 숫자는 3배로 증가했고

문맹퇴치 5개년사업을 통해서 비문해율은 45년 78%에서 58년 4.1%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초/중등 교육과정에서는 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에 대한 교육이 반복적이고 일괄적으로 포함되어지게 되었다.

 

독재를 하고자 했던 정권이 이러한 교육을?

사실상 반대의 효과를 나타낸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공산주의, 그당시에는 스탈린 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북한 소련이 채택하고 있는 방식을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특히나 '반공'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강조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교육과 홍보로 연결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교육붐을 통해서 60년대에는 대학생만 무려 9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문화적 상황, 사회적상황, 교육적 상황 통틀어서 지켜보면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에 대한 고양은 예견되어져 있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언론에서는 언론대로 민주주의 의식을 강조하고, 교육에서는 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을 강조하고

반복하고 있다.

 

 

 

## 혁명의 시작

 

1959년 6월 29일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정부통령 후보지명대회가 되었다.

진행 도중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가 있자

돌연히 정회한뒤 전당대회를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로 바꾼것이다.

 

또한 7월 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이라고 일컫을 수 있는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 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처형이 된것이라고 한다.

법과 관련되어서 재심이라던지 법적인 재판을 받지 못하고 외부적인 억압으로 인해서 바로 처형이 되어진 것.

역시 권력은 어디서나 존재를 하고 어디서나 암흑색의 색깔을 띄기 마련이다.

누구나 다 권력에 대해서 목말라하고 받고 싶지만 위에서 조절하는 사람은 전부다 따로 존재를 한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람들의 힘일수록 더욱더 막강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닐까?

 

 

앞서 이야기한 내용들은 419혁명의 기초적인 토대가 되는 사회적구조와 변화상을 담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것은 419혁명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누가 주체인지 확인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서두는 절미하고 419혁명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다.


 

 

# 419 혁명 피의 화요일

419혁명은 4월 19일 화요일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청주, 대전,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동안 미비하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류를 하였고 서울시내 대부분의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도 시위에 합류를 하게 되었다.

그들이 외쳤던 구호는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등이라고 한다.

 

이에 정부에서는 귀가조치를 시행했으나 10만명 이상의 학생들과 시민이 몰려나왔고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정도가 되었다.

학생들은 세방향으로 나누어 국회의사당이 있던 태평로를 점거하고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중앙청앞에서 저지선을 형성하여 공포탄과 최루탄을 통하여 강경대응하였다.

 

오후 1시 30분 경찰이 '곽영주'의 지휘하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했고

선두에 있던 여러명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 때 발포로 인해서 21명 사망, 172명 부상이 일어났다.

발포가 일어난 지역은 서울, 부산, 광주 이렇게 3군데 이며 나머지는 발포가 없어 사상자가 없었다고 한다.

 

박 전대통령의 탄핵시위때에도 이렇게 촛불시위를 했던것으로 기억을 한다.

숨겨진 문건내에는 사람으로써 생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담겨있는것으로 기억을하고 있다.

단지, 시위를 평화적으로 하고 면담을 요청했다는 것에 대해서 울분을 토해내고

발포를 허락하고 허용해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아니면 권력의 맛에 길들여져서 시민들의 생명과 안위는 생각조차 못한것일까?

 

이에 정부는 19일 당일 오후 3시에 서울 지역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한다.

총격사망문제를 덮기 위해 1시로 소급하여 적용하였다고 한다.

계엄령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수원 일대에 선포가 되었다.

하지만 계엄군은 경찰과는 다르게 시위대와 우호적으로 대립을 했다고 한다.

이에 해당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이승만이 경찰세력을 비호하는 한편 독재 연장에 공헌을 한 적 있는 군부에게 보상을 제대로 내려주지 않은점

- 국내의 무력조직으로서 경찰과 군의 라이벌의식은 상당했다는 점

- 부통령 후보였던 국방부 장관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점

 

이러한 시대 상황으로 군은 시민군에게 최대한 친절히 베풀었다고 한다.

 

419 혁명 이후에 교수들이 시위에 참여를 하게 되었고 어린이들까지 참여를 했다고 한다.

이에 이승만은 결국 하야를 하고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고 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도 하나하나 정리가 되고

하야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